오백 년 간 이어져 온 ‘장마’ 라는 다정한 이름이 시나브로 자취를 감추고 있는 것 같다. 매실이 푸르게 익어갈 무렵 대지를 적시던 촉촉한 단비라 하여 매우(梅雨)라고도 칭했던 이름은 가고, 이제는 아열대성 기습 폭우를 뜻하는 ‘우기’ 라는 거친 명칭이 우리 삶의 자리를 비집고 들어올지도 모른다고 누군가 이야기 했다.
선선한 아침저녁의 행운 뒤에 도사린 이 ‘제5의 계절’ 은 단순히 기후의 변화만을 의미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알던 익숙한 세계가 해체되고, 전혀 새로운 생존의 질서가 도래했음을 알리는 두려운 신호탄이다. 이 거대한 자연의 격변 앞에서, 우리 사회의 가장 깊은 곳에 자리한 농촌과 농민의 존재 역시 유령처럼 희미해져 가고 있다.
선거라는 거대한 사회적 의례가 끝날 때마다 세상은 늘 새로운 목소리를 찾아 분주하게 움직인다. 이번에도 예외는 아니어서, 정치권과 언론은 세대별 표심과 지형 변화를 분석하는 현란한 말들로 넘쳐난다. 변화를 포착하고 다가올 미래를 예측하려는 분주함 속에서, 역설적이게도 농촌의 목소리는 완벽한 진공 상태에 갇혀버렸다.
그러나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들리지 않는 소리, 즉 점차 줄어들고 소멸해 가는 농민들의 침묵이다. 거대한 정치적 지각변동 속에서 농촌은 변함없이 소외되었고, 그 소외의 고착화 속에서 농민들이 내는 새롭고 나지막한 목소리는 사회적 소음 속에 묻히고 있다.
오늘날 농촌에서 들려오는 새로운 목소리는 과거의 그것과 결이 다르다. 과거의 농민 운동이 생존권을 요구하는 거칠고 조직적인 외침이었다면, 지금 농촌 구석구석에서 새어 나오는 목소리는 깊은 고립감과 존재론적 소멸의 공포에 가깝다.
도시 중심의 산업화와 정보화 속에서 농촌의 인구는 해마다 격감하여 이제는 소수점 이하의 통계로 전락한 지 오래다. 수적 열세는 필연적으로 발언권의 상실로 이어진다. 도시의 거대한 아파트 숲이 뿜어내는 욕망의 소리에 가려, 제5의 계절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흙을 일구는 이들의 가냘픈 신음은 더 이상 도시인들의 귀에 닿지 않는다.
더욱 서글픈 것은 오랜 역사 속에서 사회 변혁의 두 축을 이루었던 ‘노동자와 농민’이라는 계급적 연대와 그 상징적 의미마저 완전히 퇴색했다. 산업화 시대의 농민은 노동자와 함께 사회를 지탱하는 신성한 생산의 주체이자, 인간 존엄을 지키는 계급의 보루였다.
그러나 신자유주의와 거대한 자본의 물결은 농민에게서 그 계급적 지위마저 박탈해 버렸다. 오늘날 농업은 기업화된 유통망의 말단 플랫폼으로 전락했고, 농민은 노동자도 경영인도 아닌 자본의 주변부로 밀려났다. '노농(勞農) 연대' 라는 오랜 구호는 박물관의 유물이 되었고, 농민은 홀로 고립된 섬처럼 섬뜩한 소외를 마주하고 있다.
이처럼 도시와 농촌의 격차가 벌어지는 수준을 넘어 농촌이라는 공간 자체가 소멸해 가는 현실은, 우리에게 농업의 본질을 다시 묻게 만든다. 기후 변화로 인해 농업의 기반이 흔들리는 와중에도, 도시는 농촌을 그저 식자재의 공급기지나 주말의 여가를 위한 낭만적인 소비 공간으로만 인식하려 한다.
장마가 우기로 바뀌는 기후의 대전환기 속에서, 농민들이 겪는 농작물의 파산과 삶의 궤멸은 도시의 안락한 식탁 위에서는 그저 몇 퍼센트의 물가상승률이라는 수치로만 환산될 뿐이다.
결국 이번 선거와 그 이후의 풍경이 우리에게 남긴 가장 뼈아픈 질문은 정치적 승패에 있지 않다. 그것은 ‘장마’ 가 ‘우기’ 라는 낯선 계절로 명명되듯, 우리가 알던 농촌의 시대가 끝단을 향하고 있다는 엄중한 경고다. 청년의 표심을 분석하고 노동의 미래를 논하는 그 수많은 담론의 홍수 속에서, 우리는 가장 근원적인 질문을 통째로 잃어버렸다.
생명의 근원을 잉태하던 흙의 가치는 어디로 갔는가. 대대로 이 땅을 지켜온 농민들의 역사와 삶의 궤적은 다가올 제5의 계절 앞에서 이대로 흔적도 없이 쓸려 내려갈 것인가. 변함없는 소외 속에서 묵묵히 씨앗을 뿌리는 저 서글픈 손길들을 바라보며, 우리는 이 시대의 가장 어두운 사각지대를 향해 절박하게 묻지 않을 수 없다.
과연 우리의 농업은, 우리의 농촌은, 그리고 우리의 농민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